햇살 속으로
정호승
경주박물관에 가면
몸은 온데간데 없고
돌부처의 머리만 길가에
쓸쓸히 앉아 있다
나는 어느 여름날
아내와 양산을 받쳐쓰고
그 돌부처의 머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
내 머리를 그 자리에 떼어놓고
돌부처의 머리를 내 머리에 얹고는
천천히 길을 걸었다
봉숭아 꽃잎을 바라보며
햇살 속으로
『제15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』 문학사상사, 2000
“경주박물관에 가면/몸은 온데간데 없고/돌부처의 머리만 길가에/쓸쓸히 앉아 있다//……/그 돌부처의 머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/내 머리를 그 자리에 떼어놓고/돌부처의 머리를 내 머리에 얹고는/천천히 길을 걸었다//……”
이제 밤이면 귀뚜리 소리가 사위四圍를 점차 에워싸고 있지만 아직은 여름입니다. 아직 휴가를 다녀오지 못하신 분들은 아쉬워만 말고 바로 여행 떠나실 것을 권합니다. 물론 저도 머리 위까지 솟아있는 배낭을 메고 피서객으로 가득 찬 버스를 타고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열풍에 땀을 식히며 바다로 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만,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떠나는 여행은 혈기 가득한 나이 때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. 한낮의 뜨거움과 해 질 녘의 안정감이 공존하는 이 무렵의 여행에선, 더욱 또렷해진 별빛 아래 얘기를 나누다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단잠에 빠질 수 있는 덤까지 따라옵니다. 작열하는 볕 아래서는 모든 게 귀찮아지지만, 8월 하순의 여행에선 ‘돌부처의 머리를 내 머리에 얹고는/천천히 길을’ 갈 수 있는 여유로움마저 생긴답니다.
모든 생명에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.
소향의 ‘바람의 노래’입니다.
김상균 약력
김상균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. 1985년 <가락>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, 시집으로 <자작나무, 눈, 프로스트>와 <깊은 기억> 등이 있다.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교감으로 퇴임하였다. 다수의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는 사진작가이며, 일찍부터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시와 글을 써온 예술 애호가이자, 70년대 후반부터 배낭여행을 해온 여행 전문가이기도 하다.